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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오늘, 내 안에 있는 것 
오늘의 영감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펼쳐내는 김형기 미디어 아티스트(물리학 79)



도심 한가운데서 마주친 거대한 물결 
지난해 동탄 지역에 오픈한 한 백화점의 외관, 가로 16m, 세로 10.5m의 크기로 설치된 대형 미디어 아트월의 스크린 속 넘실거리는 거대한 웨이브 앞에서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세 개의 큐브 위에 하나씩 공이 담겨 채워지고 이것이 리듬감 있게 분리되고 확장되면서 물결의 형상으로 바뀌어 다양한 웨이브로 변주된다. 도심 한가운데서 물결치는 비주얼을 통해 우주적인 에너지로 깊게 몰입하고 호흡하면서 거리를 오가는 도시인들의 일상에 잠시 멈춤, ‘쉼’의 순간을 선사했다. 현실의 시공간에 무한한 상상력으로 꿈속 같은 비현실적인 감동을 주었던 이 압도적인 작품은 백남준을 이은 차세대 한국 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려온 김형기 작가의 작품이다. 그는 미디어 아트라는 말이 생소했던 80년대부터 시대를 앞서 이 장르를 개척해 온 선구자이지만 매 순간 누구보다 가장 열정적으로 작품에 매진하는 ‘오늘의 작가’다. 

물리학도, 예술가들의 수도 파리로 떠나다 
김형기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영감과 감수성의 원천이 되어 준 것은 대학 시절이다. 그는 <화우회>와 <연세춘추>에서 활약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지만 예술가는 고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선입견 때문에 물리학과에 진학했던 김형기 작가는 미술 동아리 <화우회>에서 소묘, 크로키, 유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리며 작가로서 창작욕을 맘껏 펼쳐냈고, <연세춘추>에서는 사진 기자와 만평 기자로 활약했다. 특히 춘추 만평은 제호부터 그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아직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엄혹한 시대였기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시위 학생들을 구타하는 전경들을 찍었다가 발각돼 카메라를 들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학교 수업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없었다. 그런 비관적인 시절이었지만 선후배들과 함께 그 시간들을 견디며 생각을 나누고 공감했다. 윤동주 시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가슴 뜨거웠던 청년 시절, 그런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예술이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파리로의 유학이다.
“저는 과거에도 현재도 언제나 작가로 살기를 꿈꿔왔습니다. 인생을 사는 데 예술 작품으로 은유하고 표현하고 또 그것을 통해 감동을 전하고 영향을 주는 가장 좋은 직업이 바로 예술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유명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1985년 가방 하나 들고 무작정 파리로 떠났습니다.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물리학도가 예술가가 되기 위해 떠난 길에서 사실 김형기 작가의 손에는 입학할 학교의 합격 통지도 없었고 불어 실력도 미흡했다. 마중 나오기로 한 친구도 제시간에 맞춰 오지 못했지만 그가 도착한 파리는 마치 자신이 이미 살았던 곳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그리고 정말 그에게 파리에서의 생활은 그랬다. 지원 기간이 맞지 않아 1년여의 준비와 기다림 끝에 회화 전공으로 입학한 파리국립미술대학에서의 수업은 예술적 토양이 풍부했고 스펙트럼은 무척 넓었다. 다양한 장르들을 실험해 보며 작품의 상상력과 그의 세계관을 확장했다.
캔버스의 한계를 넘다  
“사실 이전까지는 회화, 그것도 현상을 똑같이 그리거나 인상파 작품 정도까지를 작품이라 생각했습니다. 실험적인 예술들은 다 엉터리라고 말하곤 했어요. 유학 가기 전 프랑스 현대작가 6인 전을 봤는데 빈 공간에 텐트천을 걸어놓고 거기에 누에고치 같은 패턴을 그려 전시해 놓은 것을 보고는 이건 작품이 아니라 사기 아닌가 생각이 들었죠. 그 작품은 20세기 후반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작가들의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 사조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프랑스에 가서 그 작품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모순을 밝히겠다고 큰소리치기도 했었죠. 사실 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그 작가들이 바로 교수님들이었어요. (웃음) 그만큼 제가 잘 몰랐었죠.”

파리미술대학에서의 수업은 다양했고 원하는 장르의 수업은 무엇이든지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김형기 작가의 작품 폭도 확장됐다. 그가 실험적인 예술에 대한 선입견을 바꿀 수 있었던 계기는 크로키 수업 시간이었다.
“데생(dessin) 수업 중 ‘무브망(movement)’ 수업에 참여했는데 무브망이라는 말 그대로 춤추고 움직이는 모델들을 대상으로 데생을 해야 했습니다. 기존까지 제게 데생은 고정된 모델의 포즈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었거든요. 무브망 데생은 모델의 움직임을 보고 순간 포착해서 재빨리 그리거나 캔버스를 보지 않고 모델만 보면서 그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완성된 결과를 보니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라인도 답답하지 않고 더 경쾌했습니다. 또 제가 움직임을 보며 느꼈던 그 순간의 감성이 그대로 그림에 담겨 있더라고요. 그때 제가 고수했던 예술에 대한 관점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후부터 다른 작품을 공부해 보기로 했지요.”
회화 전공으로 입학했지만 이후 그는 캔버스를 넘어 다양한 경험과 시도들을 했다. 석판화, 동판화, 조각, 회화, 개념 추상, 사운드 아트, 키네틱 아트 등 자신의 창조적인 영감을 캔버스에 한정하지 않고 다채롭게 펼쳐냈다. 그런 시도들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이 미디어 아트였다. 그가 좋아하는 시, 향수, 코냑, 에스프레소 등 진한 농축액이 조금씩 번지는 느낌, 그 감성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미디어 아트라는 판단이 섰다. 영화가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예술이라면 시는 감성이 함축된 장르다. 김형기 작가는 그런 시와 같은 예술을 하고 싶었다. 그는 파리국립미술학교 개인전 지원 작가로 선정됐고, 여러 전시회와 ‘르 피가로’지에 작품이 소개되는 등 파리 무대에서 인정받았다.
너와 나의 존재, 그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
미디어 아트라는 말이 생소했던 20여 년 전, 김형기 작가는 이미 이 분야에서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최근 몇 년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키네틱 아트, 디지털 아트 등에 사용된 다양한 작품 방식들은 이미 그가 몇 번쯤은 시도했고, 줄곧 선보였던 방식이다. 그의 홈페이지에 빼곡한 작품 포트폴리오 속에서 그 면면을 엿볼 수 있다. 

내일의 작가전 전시를 위해 프랑스에서 귀국한 그는 이후 삼성미술관 아틀리에 입주 작가로 초청받아 계속 한국에 머물게 됐다. 귀국 후의 작품 활동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Performance Zero〉라는 공연물을 했는가 하면, 우리 대학교 미래캠퍼스의 독수리상과 윤동주 시비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미디어 아트 작가로서는 보기 드문 폭넓은 스펙트럼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회화와 조각, 공연, 미디어 설치까지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다. 그가 참여했던 첫 전시에서 지금까지, 그는 변화무쌍한 미디어의 진화에 발맞춰 다양한 변신을 시도했지만, 그는 어떤 미디어에 담겨 있든지 핵심은 ‘콘텐츠와 메시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저는 늘 작품 생각이 많아요. 하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메모해 둔 것만 수백 개가 될 거예요.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는 너무 큰 이야기보다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나와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 신비롭죠. 내가 존재하는 이 순간, 이 존재 자체를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유기체 컴퓨터와 같아요. 유기체의 램이고, 메모리이고, 우리의 에너지는 전지라고 할 수도 있어요. 또 우리의 심장이 뛰는 순간들, 쉬지 않고 현재까지 심장이 뛴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 신기해요. 기계로 만들 수 없는 우리의 생각, 사랑, 행복, 시샘의 마음들,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의 집합인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소중함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요.” 
미디어의 변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는 작품
김형기 작가의 메시지는 시대상에 따라 또 새로운 미디어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며 구현돼 왔는데, 그는 특히 ‘물’과 ‘얼굴’을 작품의 소재로 인간 내면의 서정성을 극대화하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지난해 공근혜갤러리에서 전시했던 <ArtiFace, Artificial sur Face> 작품이다. 가상과 실제의 나를 교묘히 섞어 놓은 입체 영상 설치 작품으로 실제 인물의 촬영 이미지가 3D로 가공돼 움직인다. 자신이 욕망하는 모습이지만 실제 내가 아닌, 하지만 또 나이기도 한 아바타 이미지를 통해 가상과 실제를 교묘히 섞어 놓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입체 영상이다. 현실과 공존하는 가상 속에서 끄집어낸 나의 실존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9년 발표한 <I’m the Light>라는 작품을 기술적으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당시에는 실사를 촬영해 마치 조각처럼 실물의 형상에 맞춘 LED에 영상을 보여줬다면 현재 <Artiface>는 메타버스 시대에 맞춰 실사를 사용하지 않고 아바타와 같이 미화된 이미지로 가공해 사용했다. 이렇게 김형기 작가에게는 자신의 전작들을 다시 재구성하고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도 큰 즐거움이자 과제이다.
“과거에 만든 작품은 제작비의 한계로 때론 욕심만큼 다 시도해 보지 못한 부분도 있고, 또 규모가 큰 설치 작품들은 어딘가에 소장되지 않으면 보관할 수 없으니, 작품을 해체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사진으로만 남은 작품들도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시도했던 작품, 그 안의 콘텐츠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특장점들을 살려 발전시켜 보려고 해요. 오늘날의 시각에서 각광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런 작품을 스토리가 있는 콘셉트와 메시지, 비주얼의 즐거움을 더해 재창조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한 토큰)도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드로잉 작품은 소장하기 수월하지만 미디어 아트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또, 매체가 바뀌면 작품의 형태가 바뀌어야 하는 것. 미디어 아트는 메타버스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아카이빙 할 수 있는 최적의 장르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
그는 현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예술공학 교육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원하던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고 작품을 만드는 순간에는 언제나 설렜던 그이지만, 지금 시대 청년들의 고민과 방황, 성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MZ 세대들이 자신의 청년 시절과는 다른 차원의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저도 방황하는 아들 때문에 많이 걱정했었어요. 대학을 세 번이나 다니더라고요. (웃음) 하지만 젊었을 때의 고민은 젊은이의 특권이라 말하고 싶어요.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단, 그렇게 해결되는 것은 다 젊은 시절의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에요. 고민에 매몰되지 않은 건강한 고민은 괜찮습니다. 그것들이 모여 나를 단단하게 서게 할 것이고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 말해주고 싶어요.”
김형기 작가의 아내는 그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당신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의 생각도 같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나쁘지 않다(pas si mal).”고 말하고 싶다.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의 메모장은 더 많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가득할 것 같다. 즉 좋은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로, 또 먼저 예술을 시작한 선배로서 좋은 가르침을 주는 교수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세계적인 명성이나 작가로서의 상업적인 성공이 없어도 마치 그가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하고 싶은 예술을 하는 그의 삶은 그 자체로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 그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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